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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

Dikembe Mutombo. 말년의 "나의 몸을 휘감는 황혼 앞에 맞서서.."

by sdrr23 2020. 4. 15.

.......



나이가 들었나보다.
천천히 저물어가는 노을빛에 화려하게 수놓았던 과거마저도 희미하게 바래간다.
몸에 퍼지는 알 수없는 불안감, 그 불안감에 더하는 나에 대한 불신감.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지는 무릎의 무게에, 잠시 허리를 굽혀 앉아 본다.

 

 

'이제는 무리일까..'

 

 

목을 타고 흐르는 빗물같은 땀을 젖은 수건으로 연신 닦아내며, 나는 남 모르게 중얼거려본다.
그들이 들으면 어쩌지..
홀로 입 안에서 중얼거린 말이지만, 나는 유독 신경이 쓰여 고개를 살짝 들어본다.


아무도, 아무도 내 말은 듣지 못했다.
다들 자신들의 앞에 펼쳐진 꿈에 손을 뻗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중이다.
그 젊고 패기 넘치는 얼굴들을 보니, 나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듯 하다.
하지만, 고개를 다시 숙인 나에게, 조금은 느껴지던 안도가 비참하게 비춰진다.


나는...

나는 뒤쳐졌다.
이제 그들과 함께 뛰어갈 수 있는 체력이, 나에게는 남아있지 않다.
이제는 정말 무리인걸까..
내가 바로 이 곳에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아주기는 하는 걸까..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던 나의 구역. 아니 침범하지 못할거라 필사적으로 믿었던 나의 구역.
이제는 더 이상 나의 구역이 아니다.
늙고 병든 사자와 같이, 나는 더 이상 나의 구역을 지배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나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 없다.
늙고 힘이 빠진, 그저 남들에게 치여 버리는 빈 껍데기만이 남았을 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정말 그런가...?'


나는 주름이 깊게 파인 두 손을 힘을 주어 쥐어본다.
이렇게 나약한 모습으로, 나의 마지막을 장식할텐가?

 

15 년이나, 15 년이나 달려온 이 곳에서, 
고작 나에 대한 불신과 비참함만을 가슴에 안고 떠날 것인가?
이 머나먼 타국까지 와서, 내 자신에게 비굴해진 모습으로 돌아갈 것인가?


나의 동료들을 짓밟는 상대들의 모습이 눈 앞에 비춰지기 시작한다.
내 자신에게 화가 나기 시작한다.
힘을 꽉 준 두 손은 부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사라질 수는 없다.
이렇게 내 자신을 기만할 수는 없다.

 

 

.........



"뚝... 뚝....."


목을 타고 흐른 땀이 식기 시작한다.
하지만 조금씩, 내 마음 속에는 뜨거운 불이 다시금 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5 년전, 한 사람이 나에게 해주었던 한 마디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다.

 

"Welcome to the NBA."

 

 

그가 그 당시 나를 바라보며 느낀 감정이 이런 것일까..
자신이 흐르는 시간에 쓸려감을 느끼고,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걸까. 내가 알아주길 바랬던 것일까.



나는 여전히 이 곳에 존재한다고..
나는 여전히 증명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다고..

 

 

........


지친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그래, 나도 이제 당신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괴롭고 힘들지라도, 나는 여전히 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나의 후대들에게 보여주겠다.


그게, 내가 뒤에 남는 자들과,
그리고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걸 나는 알 수 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배웠고, 그들은 나를 통해 배울 것이다.

 

 

........


작전타임이다.

 

막 경기장에서 돌아온 후배 녀석이 힘이 들어 헐떡이고 있다.

상대편 녀석들이 많이 괴롭혔나 보지..
지친 후배는 아직 성치않은 무릎을 붙잡고 나를 올려다본다.

"D, help me."


아직 배울 것이 많은 녀석이다. 나 없이는 아직 저들에게 맞서 싸울 수 없다.



기다려라, 내가 가겠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 몸이 산산히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너의 뒤를 지켜주겠다.
너의 미래를 위해, 나는 이 닳은 두 무릎을 기꺼이 희생하겠다.

 

 

........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나에게 환한 조명이 비춰지기 시작한다.
그 것이 경기장의 조명인지, 나의 마지막을 비추는 아름다운 황혼의 빛인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이름을 부르는 관중들의 우렁찬 외침에,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휘몰아치는 관중들의 환호성 속에, 나의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나의 심장은 아직 뛰길 원한다.


비록 시간의 흐름에 닳고 닳았지만, 
나는 수많은 상대를 굴복시켰던 나의 손가락을 다시 한 번 허공을 향해 치켜세운다.


아직은, 아직은 나를 증명할 수 있다.

 

 

자, 가자!


"Ladies and Gentlemen, Here comes 'The Mou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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