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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좋은 글들)

사랑이란, 존재욕망의 다른 표현이다. (부제 : 갈라테아의 비극)

by sdrr23 2020. 4. 10.

사랑이란, 존재 욕망의 다른 표현이다.
사람마다 사랑을 정의하는 방식과 그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난 사랑을 그렇게 정의한다. 


긴 시간의 정신적 갈증과 공허의 원인을 비로소 작년에 찾았다.
그 원인은 존재 욕망의 불충족에 있었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현대 사회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겪고 있을지도 모를,
<갈라테아의 비극>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글을 이 세상의 수많은 갈라테아들에게 바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를 위해 갈라테아에 대한 소개를 먼저 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혹은 심리학에서 피그말리온이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사람들은 피그말리온을 기억하지만, 그 피그말리온이 조각했던 조각상인 갈라테아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피그말리온은 신을 모시는 여성제사장들의 타락과 부정을 보면서 여성에 대한 혐오를 키워갔다.
결국 피그말리온은 여성 제사장 뿐만 아니라 현실의 여성에 대해서도 마음을 닫은 채,
자신이 만든 <이상>이 투사된 조각상을 조각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피그말리온은 사랑에 빠진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이런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이뤄지게 해달라고 신에게 간곡히 청하게 되고 결국 신은 그 소원을 들어주게 된다.
그렇게 조각상에 불과했던 갈라테아는 결국에 <인간>이 된다. 
신화는 둘이 행복하게 살았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 둘의 사랑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을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오늘 그 이유를 써보려고 한다. 





<사랑한다>라는 문장에 대해서 먼저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말 장난으로 들릴 수 있는 부분이니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굳이 문장 분석부터 하고 넘어가려 하는 이유는, 
이 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실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문장을 완전한 문장으로 한 번 만들어보자.]


(1) 사랑을 "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살아있는 동물이 한다.  

우리는 종종 동물들의 타 종에 대한 우애를 기사로 접하고 , 견공의 주인에 대한 사랑을 기사로 접한다.
그래서 위 문장에서 "주어"의 자리에는  <행함- doing 혹은 willing-이 가능한 동물>이 들어가 
"사랑한다"는 동사와 의미상으로 호응을 이룬다. 





(2)  "사랑한다"의 대상어(목적어)는 무엇이 될까?  
물체는(더 노골적으로 무생물의 상품) 대상어가 될 수 없고, 오직 <행함이 가능한 동물>만이 대상어가 된다. 


이유는, 사랑의 속성 때문이다.  
사랑의 속성상 그것이 양자간 혹은 다자간의 소통(주고 받음을 포함해서)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방적인 구애와 집착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배우자나 연인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대화가 통하는지>를 본다.
서로 화학적인 성적 끌림에 의해 시작된 관계여도 <소통>이 되지 않으면, 
두 사람 중 어느 한 쪽이 필연적으로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 소통의 단절이 점점 진행되면 연인은 헤어진다. 친구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헤어지게 된다. 

그래서 "사랑한다"의 대상어 자리에는 <의지와 행함이 가능한 동물>이 온다.
   



다시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이상의 기준을 조각상에 투사한다. 
결국 그 조각상은 살아있지 않은 무생물의 물체이지만,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투사한 "이상"을 열렬하게 갈망한다.
하지만 무생물체가 피그말리온의 갈망에 대해 반대급부의 무언가를 줄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이상을 홀로 갈망하면서 병들어갔다. 
신은 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었고, 결국 그 조각상은 인간인 갈라테아가 된다.


나는 위에서  "사랑한다"는 말의 주어와 대상어가 <의지와 행함이 가능한 동물>이라고 언급했다.
무언가에 대한 의지가 있으며 그 의지를 행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체성>이라 할 수 있다.
갈라테아는 주체성을 가진 인간이 되었다.  
이것은 갈라테아가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고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주체성을 가진 갈라테아는 피그말리온의 계속 되는 자신의 이상에 대한 요구(현대의 기준으로 바꾸면, 살 빼라, 옷이 그게 뭐냐, 등등)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 피그말리온의 요구에 부당함을 느끼게 되고 이 둘은 결국 파국에 이른다. 



자신의 이상을 고집스럽게 강요하는 피그말리온의 요구에 대해 
갈라테아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이다.

1.  자신의 주체성을 억압하고, 피그말리온의 요구를 충실히 들어주면서 자신을 잃어가며 피그말리온의 그릇된 사랑을 받는 것
2.  자신의 주체성과 나의 자아를 지키는 것을 선택하고서 피그말리온을 떠나는 것



세상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자로부터의(부모님,연인,선생님,사회,친구) 갈라테아임과 동시에 타자를 향한(친구,연인,내 자식,사회) 피그말리온이다.
자크라깡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을 했다.
인간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이유는, 자신이 타자의 욕망을 "가진" 갈라테아가 됨으로써, 
피그말리온들(타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타자들이 욕망하는 예쁜 외모를 "내가" 갖게 된다면, 나는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타자들이 욕망하는 많은 돈을 "내가" 갖게 된다면, 나는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타자의 "욕망"을 쥐려 할수록 극심한 경쟁으로 인해 본래 나의 자아와 주체성은 훼손되고 
설령 그것을 쥔 승리자가 될지라도  "내가 가진 무언가"를 잃는다면 사람들이 날 떠날 것이라는 <소외에로의 공포>를 겪게 된다. 


"너 요번 기말고사 성적 안 올리면, 엄마 딸 아니야."
"너 요번에 살 안 빼면, 나 너랑 헤어질 거야."
"너 요번 분기에도 취업 실패하면 나 너랑 헤어질거야."


나는 존재욕망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세상에 나의 존재를 온전히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것은 나의 유아적 환상이 아닌가? 
그 경험은 전체 인생 중에 얼마 만큼의 비중을 차지할까?'

세상에 모든 부모님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필연적으로 실수를 하게 된다.
그것이 고의적인 실수이든 아니든 그 실수는 아이에게 내상을 입힌다.
(물론, 잘못을 교정해주기 위해 행하는 절제되고 아이도 수용하는 정도의 교육 목적의 체벌은 예외로 하자.)
그 내상의 정도는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아이가 이 때 겪은 존재욕망의 좌절은  억압된 채, 사회의 룰을 배우며 사회화되면서 성장한다.


그렇게 아이는 성인이 되어 연애를 시작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운 적도 없고, 
내가 살면서 평생 받아보고 그래서 알고 있는 "사랑"이란 <부모님이 나에게 해주신 사랑>말고는 없다.
인터넷에는 픽업아티스트들의 글들을 비롯해서 밀고당기기를 비롯해서 드라마와 영화 로맨스물들을 비롯해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치고 넘치며 그 결과로 미처 고민해보기도 전에 그 개념을 모두 수용하고 받아들인다.

첫 연애는 대부분 그래서 매우 이기적이다.  
연인에게 부모의 역할을 기대하며, "날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라며 연인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거나 
로맨스물에 나오는 혹은 19금 포르노그라피에 나오는  내가 만들어낸 나의 이상을 연인에게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수없이 연인을 바꾸려 들며, 
자신의 뜻대로 변하지 않는 연인을 비하하며 "인간은 안 변해. 고쳐쓰는 게 아니라지."라는 냉소를 던진다.
정작 자신은 그 사람의 다른 좋은 면들에 대해서 충분히 인정하고 받아주지도 않고 그것은 그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정작 상대방이 변할 수 있다는 용기와 동기부여를 해주지 않고 그 성장과정을 시간을 두고 꾸준히 기다리면서 지켜보지도 않은 채,
그저 자신의 이상으로 만든 <완성품>을 찾아 다닐 뿐이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이런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사람들은 사랑을 하는 자신의 능력치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생각보다는, 대상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내가 요번에 사랑을 실패했지만 이것이 내 사랑의 능력치 보다는 그저 내 파트너인 대상자가 문제이고,
대상자만 바뀐다면 아무 문제 없을것이라는 그릇된 낙관을 지적한 말이다. 

좀 더 쉽게 말해서,
'대상자가 내 이상에 맞춘 더 매력적인 사람이라면' 
혹은 
'내가 지금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이라면' 이라는 생각으로 
사랑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보고 내 사랑의 능력치를 고민해보기도 전에 
<밀고 당기기 기술> <애교 기술> <미용> <카마수트라 스킬>에 집중한다.
어딘가에 나만의 <완성품>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대상자를 찾아다닌다. 



<트로피 와이프>라는 말이 있다. 
남성들은 8등신의 몸 잘 빠지고 늘씬하고 예쁜 여성을 흠모한다. 타자(남성)의 욕망이다.
결국 예쁜 여성이라는 존재는 희소성을 갖게 되고, 이 여성을 차지하기 위한 남성들의 경쟁이 벌어진다.
이 여성을 데려가는 남성은 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돈이 많은 남성>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그 성공의 <트로피>로 미인을 얻는다. 

여기에서 하나 짚고 넘어 가자. 
남성은 이 <트로피>의  "존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며 존중하고 있을까?
그 트로피인 여성이 가진 어떤 심리적인 상처나 혹은 내적 이야기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을 보일까?
만일 이 여성의 내적 이야기 중에 <트로피에 걸맞지 않는 기준이 되는 스토리>가 있다면 남성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부정적 반응에 대해 이 여성은 남성에게  얼만큼의 좌절을 느낄까?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갈라테아의 두 가지 선택에 대해서 위에 언급한 바 있다.
갈라테아가 1번을 선택하면,
평생을 피그말리온의 이상(즉, 타자의 욕망, 이것들이 매력의 기준을 이룬다.)을 연기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갈라테아가 자신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에 대한 화를 내거나, 반대 의견을 내거나, 
현재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걱정과 불안과 우울을 내색하는 것이 싫다." 
또한,
"갈라테아는 언제나 따뜻하고 웃고 화를 내서는 안 되고 내 말을 잘 따르고 고분고분하게 착해야 한다." 라고 생각한다면,
갈라테아의 <존재욕망>은 그렇게 좌절된다.



카사노바를 아는가? 역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린 한 남성이다.
우리는 현대에도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숱하게 이성을 바꿔서 찾아다니는 사람을 카사노바라고 부른다.
카사노바의 심리적 맹점을 얘기해보려 한다. 
카사노바는 그 누구보다도 갈라테아 역할에 충실하다. 
이성이 무엇을 원하는지를(타자의 욕망)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은 열심히 그 타자의 욕망을 그대로 "연기"한다. 
자신의 본래 자아를 억압하고서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갖고 좋다고 하는 모습을 "연기"한다.
이것이 심해지면 <히스테리성 - 연극성 성격장애>로 진단되며, 
이 진단명을 가진 환자들의 주요 행동 양상(진단기준은 아니지만) 중 하나로 
"어장관리"와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바람을 피움"이 나타난다.
이성으로부터의 시선과 애정을 끌기 위한 목적의 "연기된 나의 모습"이 아닌,
"좌절된 존재의 욕망- 자신의 내부에 좋지 않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연인에게 거부되는 것이 두려워 그들은 늘 다른 이성을 물색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자신을 겉으로 드러낼 때, 이성과 헤어지고 다른 이성을 선택하는 그 순간 조차도,
"나는 쿨하다고. 그 애는 사실 내 스타일이 아니였고 마음에 안 들었어. 그래서 다른 애한테 가는 거야. 
쿨하지 못하게 질척대는 건 내 스타일이 아냐."  라고 정신승리를 한다.  
자신의 죄의식과 그 죄의식이 만들어 낸 자기 혐오를 애써 감추고서, 남들이 선망하는 <쿨함>을 연기해낸다. 


타자의 욕망을 연기할 뿐, 이들의 주체성은 손상되어 있다. 
그래서 사실 심층 심리를 분석해보면,  연인의 바람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  보다 바람을 피운 사람의 심리가 더 왜곡되어 있다. 



자신이 세운 이상의 기준은 자신의 욕심이 만들어 내고
그 이상기준을 갖고 있는 상대방의 본질을 판단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내 욕심이 그 사람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는 것이다.
타자의 욕망을 가진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람 그 자체의 본질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인의 존재욕망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사실 너무도 이상적인 이야기다. 
단점을 가진 연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하라니.
부모님도 날 그 정도로까지 사랑해주지 않았고, 
나 조차도 내 단점이 너무 싫고 내 연인에게 그렇게 해줄 자신이 없는데? 라고 반문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존재를 향한 사랑>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하면서 저런 반문이 시도 때도 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고민과 자기분석과  올 3월 초 연인과의 이별과 그 후 분석을 통해 
어느 정도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었다. 
난 이제부터 그 힌트를 근거로 한 솔루션을 적어보려고 한다. 


사실 나는 그 사랑을 하는 방식으로 늘 연인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오판이였음을 최근에 알았다. 
무엇이든 원인과 해결방안이 내 안에 있으며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중요한 원칙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의 연인이 가진 타자의 욕망에 근거한 나의 "욕망"이 아닌, 연인의 그 "존재"를 향한 사랑은, 사실 날 그렇게 사랑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1.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나의 주체성을 찾는 일이다. 

타자의 욕망과 내 마음이 얘기하는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림그리기에 재능이 있고 이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머니와 사회의 욕망대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데 그 시험을 열심히 준비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게으르고 의지 박약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외면한 체, 자신의 길이 아닌 공무원의 길을 가면,
자꾸만 시험에서 떨어지고 그 시험을 준비하는게 고역이라서 공부가 잘 안되는 것에 자기비하를 하게 된다.
내가 게으르고 못나서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냥 그것이 맞지 않아서가 이유이다.
자기 목소리가 뭐라고 얘기하는지 그 소리와 타자의 목소리를 구분하자. 



2. 무기력과 좌절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학습된 무기력>실험을 알 것이다.  
중간에 벽을 세우고 , 벽을 기준으로 양쪽에 전극을 깐다.
개가 있는 바닥 쪽의 전극의 스위치를 누른다.
개는 깜짝 놀라서 전기자극을 피해 벽 너머 다른 쪽으로 뛰어간다.
개가 다른 쪽으로 가면, 또 그쪽에서 스위치를 누른다. 그럼 또 개는 벽을 넘어 다른 쪽으로 간다.
이런 식으로 전기 자극을 계속 주다보면 개는 더이상 전기 자극을 피해 다른 쪽 공간으로 넘어갈 의지를 잃고 무기력해진다.


이 학습된 무기력과 이것을 만들어낸 좌절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주체성을 찾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내가 내 의지로 컨트롤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자기효능감 - 특정한 문제를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이나 기대감이다. >을 찾아가는 것이다.
무기력에서 벗어나면서 나를 무기력에 빠뜨린 좌절에서 해방된다. 



3. 나를 먼저 신뢰하는 것이다.


나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다. 
신뢰는 상대방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는 어떤 기준을 갖고서 상대방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신뢰는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왜 상대방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나를 먼저 신뢰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본다. 

정신분석학에서 방어기제 용어 중에 <투사>라는 용어가 있다.
쉽게 설명해서,  내가 바람피우고 싶은 욕망이 있고 혹은 내가 이전에 바람을 피운 적이 있었던 이유로,
내 연인도 나처럼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 나의 욕망과 과거의 경험을 상대방도 그렇다고 넘겨 짚어 해석하는 것이다.

<투사>로 설명해보자.
내가 나를 제대로 신뢰하지 못한다면, 
나에 대한 불신이 상대방에게 투사되어 상대방에 대한 불신으로 변질된다.
사실은 상대방이 못믿을 사람이라서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날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날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1)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떳떳해져야 한다.
바람을 피운다거나, 남의 물건을  훔친다거나, 비열하게 뒤에서 남을 모욕하고 공격한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자신의 도덕적 양심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나 스스로 양심이 엉망인 사람은 타인의 양심도 의심하고, 양심적인 타인을 단지 <위선자>로 바라본다. 
타인이 모두 나와 같이 양심이 엉망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투사하기에 양심적인 사람을 위선자로 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베 유저들이 대표적이다.)

바른 양심을 가지라는 말은 그래서 단지 도덕적 훈계가 아니다.
건강한 대인관계와 탄탄한 자아상을 갖기 위함이다.

양심이 흔들리고 어지럽혀져있는 사람의 눈에 
세상과 타인은 그저 못믿을 사람들 투성일 뿐이다. 

타인과 세상을 내 내면의 왜곡된 것을 투사해서 바라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내 스스로 떳떳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돼지 눈에는 되지가 보이고, 부처눈에는 부처가 보인다.>는 말처럼 투사를 잘 설명하는 말은 없다.



(2)

자기효능감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내가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음을 느끼고서 무기력에서 서서히 해방되며 자기 역량을 찾아가야 한다.

나 자신과의 작은 약속부터 세워서 그 약속을 실천해가자.
오늘 1만큼 해서 얻은 기쁨과 용기와 역량과 자신감이 0.5라면, 
내일은 오늘 한 1과 0.5만큼을 더해서 과제를 해결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내일 생긴 내 안의 내부 에너지가 2.5라면, 다다음날은 2.5만큼 하면 된다. 



4.  상대방과 헤어져도 끝나지 않는 계속 되는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홀로서기를 하는 것이다.

위 과정으로 만들어진 주체성과 자기신뢰는 홀로서기의 발판이 된다. 
왜 우리는 헤어진 연인에게 집착하게 될까?
혹은 연애 중에 그 사람이 떠날까봐 두려워서 집착하고 소유하려 들고 불안에 떨게 될까?

원인은 상대방을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의존심>에 있다.
상대방에게 크게 의존했던 사람일 수록, 
헤어진 후의 실연의 아픔에서 벗어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그 아픔의 강도가 강하다.
또한 다른 의존대상을 찾아 미처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갖지도 못한 채 금방 다른 이성을 만난다.

헤어질 것이 두려워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데도 그것에 대해서 항변하면서 뜻을 관철시키지 못한다.
헤어지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잘못된 요구도 수용해주면서 스스로 <갑과 을>의 관계를 형성해간다.
자신의 의존 욕심이 만든 그릇된 관계양상임을 직시하지 못하고 
"내가 상대방을 더 사랑해서 내가 을이 된 거야."라는 피해의식에 빠져버린다.
정작 상대방은 갑과 을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고있지 않고, 기뻐서 내게 해주는 호의로만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상대방이 갑질을 하면서 부당한 요구를 한다면 헤어지면 그만이다.


인간이 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본래 자기 몫의 노력이 필요하다.
연애로, 결혼으로, 내가 해야하는 본래 내 삶을 지탱하기 위한 노력의 몫을 상대방에게 넘겨서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의존을 받아주는 것은 <구원 환상>일 뿐 <사랑>이 아니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가 죽거나 헤어져서 각자 홀로 남았을 때, 혼자 인생을 살아가도록 상대방 다리에 힘을 줘야 한다.
상대방의 의존을 받아주면서 상대방이 자신이 해야할 몫을 대신 처리해준다면,
나중에 결혼해서 내가 먹여살리다가 내가 죽으면, 사회 물정 어두운 내 배우자와 내 배우자가 키워야할 아이들의 삶이 위태해진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용기와 위로와 힘을 주되 무게를 덜어주되 의존을 받아줘서는 안 된다. 
또한 의존적인 쪽은 의존을 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애정을 내 내부의 힘으로 전환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서 평시에는 상대방에게 의존해서 상대방의 삶에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
평시에 서로 사랑하면서 각자의 힘을 키워가다가,
어느 한쪽이 힘들어지는 시기가 오면, 
그동안 그 사람 덕에 만들어진 내 내면의 힘으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무게의 일부를 덜어서 내가 더 가져가면 된다.


[사실 그대 있음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왔음에 감사하오. - 김광진 편지 중 일부]


전우란,
어둠 속에서 함께 작은 촛불 들고 가는 사이이다.
어둠 속에서 저 먼 하늘에 뜬 별은 나의 전우가 아니다.

작은 촛불 함께 들고 가면서,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손으로 바람을 잘 막고 가면서 
상대방의 불이 꺼지면 내 불씨를 주고 
점점 그렇게 함께 그 불씨의 크기의 양을 키워가자. 





5. 상대방 앞에서 연기하지 말자 (내 주체성을 지키는 것의 또 다른 맥락의 이야기)


나는 현재 슬프고 힘든데, 매력 연출을 위해 나의 현 존재를 외면하고 가면을 쓰고서 연기한다.
밝은 척, 사랑스러운 척, 섭섭한데 그것을 숨기고서 내가 더 매력적으로 굴면 된다는 생각으로 또 다른 연기를 하지 말자.
상대방과 어떤 소통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나의 연기를 보고서 말하고 대답할 뿐,  그 연기 속의 진짜 나와 소통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를 감추는 연애는 결국 소통의 실패와 단절로 그 관계는 파국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연기 말고, 
상대방을 기분나쁘지 않게 다치지 않게 하는 의사 전달 방법을 배우자.




6. 사심을 버리자

욕심은 일을 그르친다.  
사심과 사념은 본질을 보는 눈을 흐린다.
사념은 욕심과 허영심과 어지럽고 흔들리는 나의 내면세계가 반영된다.

내가 만냐아 하는 사람은  타자의 욕망을 쥐고서 매혹적인 연기를 하는 사람이 아닌,
삶과 미래와 인간과 세상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머리 맞대고 대화하고 고민해서 해결방법을 도출해낼 수 있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간적 본질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매력이라는 기준과 내가 내 욕심으로 만든 이상의 기준은
그 사심은
상대를 보는 눈을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헤어질 때, 
이것이 아니다 싶을 때 과감히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또한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리하게 을의 태도를 취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바라고있기 때문이다.-욕심-"

상대방에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사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자.
그것을 찾는다면, 
그것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그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면, 상대에게서 구하려 애쓸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가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7. 궁극적으로, 결론적으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함, 그 자체로 감사하며,  그 자체로 사랑하자.


나를 이렇게 바라보는 순간,
나의 연인이 이 세상 어딘가에 건강히 잘 존재함 그 자체로 만족하며 더는 바랄 게 없어진다.

그를 "욕망"하는 것이 아닌, 
그의 존재를 "사랑"하기에,
그가 비록 현재 내 옆에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할지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감사할 수 있다.


타자의 욕망을 가진 나를
타자의 욕망을 가진 연인을 "욕망"하지 말고,
타자의 욕망이라는 몇가지 안되는 단식판단으로 날 재단하고 연인을 재단하면서 "욕망"하지 말고,

많은 다양한 가치를 가진 나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서
그 존재를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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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R 히키코모리 님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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